[기고문] BOOK FOR DREAM (버마 난민촌 도서관 만들기) 
김아진 2008-06-17

 편집자 주 - 김아진님은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사무소에서 자원활동가로 근무중이며 8월이면 스웨덴의 한 대학에 인권법을 공부하기 위해 떠납니다. 김아진님은 공부후 국제사면위원회와 난민을 도우는 국제NGO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김아진님의 꿈이 이루어져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1. 떠나기 전에 2008.5.31
    우리는 “book for dream" 프로젝트의 책 정리를 위해 아시아 공동체 학교에 모였다. 영어학습 관련 출판사, 뜻있는 부산시민들이 보내주신 책들을 난민캠프로 가져가기 위해 정리하고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책분류 작업

      1000권도 넘는 이 책들을 어떻게 다 분류하고 다시 포장할까? 가득한 책 박스들을 보았을 때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리가 다 되었다. 총 8박스, 240Kg의 책...  나는 박스 하나를 들 수도 없을 만큼 무거운 책들. 그 무게만큼이나 큰 꿈과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가는 발걸음...설레임으로 가득하다.

2. 떠나기 & 도착하기
* 2008.6.6

    다시 아시아공동체 학교에 모였다. 박효석 대표님께서 책 외에도 학교에 전해줄 공책, 물감, 크레파스 등을 한아름 챙겨 두셔서 그걸 정리하느라 30분 정도는 걸린 듯하다.   아시아공동체 학교에서 1층 차까지 책을 옮기는 대 작업을 하고 학용품들은 각자의 가방에 최대한 쑤셔넣고 공항으로 향한다. 배낭여행족인 나는 무거운 짐을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우리가 잠깐 고생해서 난민캠프 친구들에게 더 많은 걸 전해줄 수 있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있는 일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책들을 옮기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거운 카트를 낑낑대며 끌어서 카운터에 들어섰다. 우리의 책 무게는 240Kg가 넘었다. 하지만 타이항공의 협조와 카운터에 계시던 직원의 배려로 책들을 무사히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50분정도 지연이 된단다.

*2008.6.7
    umpiem camp는 어떤 곳일까? 또 그곳에 새워질 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져가는 책들이 정말 도움이 될까?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5시간 반 정도를 보낸 후에 자정이 조금 지나서 우리는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부치는 것도 그랬지만 찾는 것도 그 무게 때문에 만만치 않았다. 세관을 통과하는데 면세로 들어가니 카트 가득한 박스를 본 세관직원이 ‘신고’하러 가라고 돌려세웠다. 세관 직원들에게 이 책들의 취지를 설명하니 처음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하필 샘플로 뜯어본 책이 바로 가장 반짝반짝한 새책들 일색이었으니.. 이런 비싼 영어책만 9박스라면 ‘밀수’라 의심할 법도 했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자국민도 아닌, 버마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하니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마침 쭉 삐져나온 책들이 부산시민들이 보내주신 헌책들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흔적 있는 헌책들을 보더니 세관직원의 표정에 안도감이 보였다. 그래서 다른 박스들은 뜯지 않고 감사하게도 무사통과!

    그렇게 나오니 벌써 오전 1시였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방콕 주재 영국문화원 직원인 “수”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리의 목적지인 ‘매솟’을 향해 곧바로 출발했다. 졸다가 잠들다, 뒤척이다 깨어보니 어느새 우리는 태국 북부를 향해 성큼 다가서 있었다. 다섯 시간쯤 달렸나보다...아침해가 뜰 무렵 “두이 무어 써”라는 작은 시장에 멈춰섰다.

무이 무이써 시장  

    아침을 맞이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일상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모두 “따나까”를 곱게 칠한 버마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용히 과일이며 채소를 가지런히 정열하고 서로 활기차게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서 버마 아주머니가 인심좋게 썰어주시는 아보카도도 맛보고, 까주시는 리치도 맛있게 먹으면서 열심히 시장구경을 했다. 시장에 오니 태국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났다.                                                                 

                                  메솟에서의 간단한 아침 식사                                              시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시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더 달려서 오전 8시 30분쯤에 드디어 매솟에 도착했다. 매솟은 태국 북부에 있는 버마와의 국경도시이며, 버마를 탈출한 카렌족이 모여 살고 있는 난민캠프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야하는 “umpiem camp"는 이곳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곳 매솟에서 버마학생민족동맹의 활동가인 쿤티(Kuntee)와 만나기로 했다. 벌써 허기가 져 있는 상태라 시내에 있는 식당에서 쌀국수와 딤섬으로 태국음식과 조우했다. 다행히 모두들 따뜻한 국수 국물과 한입가득 새우가 씹히는 딤섬을 좋아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푼 후 우리의 목적지인 “umpiem refugee camp"로 출발했다.  가는 길은 우리나라 강원도 산길을 무색케 할 만큼 굽이굽이 골짜기였다. 그리고 양 옆으로 쭉쭉 뻗은 활엽수림은 이곳이 열대임을 느끼게 해줬다. 방콕에서 봐 왔던 쭉쭉 뻗은 4차선 도로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산속 깊은 곳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다는 게 새삼 태국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간 쯤 갔을까? 갑자기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솟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가 너무 쾌청했기에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 걱정이었다.  비 걱정과 함께 나는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버마난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의 생각없는 말이 경솔한 행동이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사진은 찍을 수 있을까? 또 찍어야 할까? 비가 오는데 난민촌에 배수구는 제대로 뚫려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갖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마음을 무겁게 했다.

     두 시간여를 달려 우리 일행은 마침내 “umpiem refugee camp"에 도착했다. 비는 아직도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군인인 듯 한 남자 두 사람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소의 나라’라는 태국의 인상과는 달리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기만 했다. 군인이기 때문이었을까? 난민을 관할하기 때문에 엄격해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새삼 긴장되었다. ‘수’가 준비한 방문신청서를 내고 조금 기다리니 마침내 허가가 떨어졌다. 사진은 역시나 금지된다는 조건과 함께...

    난민촌 입구에 들어서니 마침 이날이 UNHCR이 1달에 한번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주는 날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 줄을 서 있고, 또 양동이 가득 쌀을 담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태국정부가 난민들에게는 어떠한 경제적 활동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양식은 UNHCR의 배급뿐이란다. 희망을 잃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 자기 몸만한 양동이를 힘겹게 들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의 뒷모습이 가슴 아팠다.

                                    

    아직도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난민촌으로 들어섰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들과 거기에 널린 빨래들 그리고 하릴 없이 길목을 지키고 앉은 사람들...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낮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담배를 피거나 수다를 떠는 게 전부이기에 이들이 느끼는 절망감의 깊이는 가늠할 만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비에 젖은 흙바닥에서 흙썰매를 타는 아이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을 비누방울을 열심히 불어대는 소녀, 눈이 마주치면 수줍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조금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면, 그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듯 했다.

비누방울을 부는 아이

    우리는 조경재선생님이 지난 해 방문했던 그 작은 학교를 찾아 한참을 헤매였다. 이곳 난민촌은 번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모양 또한 하나같이 똑같아서 버마 사람들 조차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은 듯 했다. 사진 속 그 학교를 찾아 헤매던 중에, 조선생님께서 만나셨다는 그 버마 선생님을 아는 분을 발견했다. 족구를 잘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책을 간절히 원하던 그 선생님은 난민신청을 해서 미국으로 가셨다고 했다. 그 선생님이 떠나 버리자 그 학교는 더 이상 운영을 못하고 그냥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허탈했다. 자의식이 있고, 난민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선진국인 제3국으로 가버리고, 난민촌에는 아이들과 노인들, 여자들만 남는단다. 그래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길이 자꾸 막혀버리고 상황은 여전히 나빠지기만 한다. 쿤티 또한 본인이 12년간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지들이 다 떠나버려서 모든 것이 ‘불안정’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버마식 까페에 앉아 버마 티를 마시며(맛은 인도의 짜이와 비슷하지만 약간 더 달콤하고 더 진한 듯 함), 버마 샐러드와 과자를 먹으며 이런 상황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했다.

   결국 책을 또다른 새롭게 세워진 학교에 기증하기로 하고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갔다. 올라가는 중에 한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영어로 “안녕하세요..어디서 오셨어요?" 이라 반갑게 물으며 우리를 불렀다. 옆을 보니 학교인 듯한 건물에 건장한 청년들이 열심히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친절한 아주머니 뒤의 학교를 짓고 있는 모습과 책나르는 모습
“학교인가요?”
“네. 지금 짓고 있는 이 건물은 유치원이에요. 들어와서 한번 보시겠어요?”
우리는 아주머니의 친절한 안내에 건물을 둘러보았다. 작년에 새로 세워진 “section 16 umpiem primary school"은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1~4학년까지를 영어와 버마어로 가르친다고 했다. 과목도 영어, 국어(버마어)부터 수학, 지리, 자연, 음악까지 다양했고, 버마어를 모르는 학생들을 위한 태국어로 수업하는 특별반도 있었다. 알고보니 나를 안내해 주신 분이 각각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이셨다. 우리는 교무실에 가서 가지런히 놓여진 분필과 분필지우개, European Commission에서 지원된 공책들 그리고 몇 안되는 교재들도 보았다.

학교안에 있는 지우개와 분필들

   교실은 각 학년 별로 나누어져 있었고 투박하지만 정성스레 만들어진 책걸상이 반듯이 놓여져 있고 벽에는 영어 알파벳 단어판, 버마어 단어판 그리고 수업시 주의사항을 담은 듯한 공지판이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안내해 주시는 선생님들 또한 열정적이고 열의에 가득 차 계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잘 정리된 교실

    우리는 마침내 이곳에 “꿈의 도서관”을 짓기로 했다. 문제는 이곳에 도서관을 만들 집이 없다는 것...방 한칸 남짓한 집을 짓는데는 5,500밧(우리돈으로 16만원 남짓) 정도가 든다고 했다. 이 학교에서 5,500밧이란 큰 돈이 있을리 만무했고...고민 끝에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기부받은 돈 중 일부를 도서관이 들어가는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책은 이미 천권이 넘으니 그 책들이 잘 보관되고 이용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뜻깊을 것 같았다.
     umpiem 학교 교장선생님과 아시아공동체 학교 박효석 대표님이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시고 우리는 우리 프로젝트의 취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어느새 한자리에 모인 다른 선생님들도 학교에 도서관이 생기고 또 학생들이 공부할 영어책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책을 옮기기 전에 우리는 서로 악수하고 인사를 했다. 한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은서”를 자꾸 외치셨다. 무슨 소리인가...궁금했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버마를 여행할 때 한국사람인 내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이 “은서를 아느냐?”였다. (은서는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송혜교가 맡았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그래서 혹시 “autumn's fairy tale?"이라고 물으니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맞다고 하셨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공중파 TV도 보기 힘든 이곳에도 ”한류“는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보니 불법복제 DVD 가게가 여럿 있었다. 직접 들여다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태국 내에서처럼 한국 드라마, 영화가 당당히 한쪽 코너를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다른 선생님께서는 본인은 ‘권상우’를 좋아하신단다. 그러면서 ”All Korean are beautiful and handsome." 이라고 하신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아마도 오늘 우리 일행을 보신 후에는 그게 아니란 걸 느끼시지 않았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마침내 책을 가져와야 할 시간. 240Kg이 넘는 이 책들을 혼자 맨몸으로 걸어가도 숨이 턱턱 차오르는 이 언덕까지 어떻게 가져오지? 또 걱정이 앞섰다. 그러자 쿤티가 아마 난민촌 입구에 세워져 있는 차를 이용하면 될 거라고 했다. 귀한 책들을 운반해야 한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 또한 어느새 일손을 돕기 위해 모여 들고, 약하게만 보이는 여자 선생님들 또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밤새 차를 타고 와서 피곤한데, 다시 내려가는 긷로 아득하기만 해서... 그냥 여기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렇게 나서는 버마 선생님들 그리고 이웃들을 보니 앉아서 책이 오기만 기다리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나도 책을 가지러 나섰다. 내려가는 길에 좀전에 나를 안내해줬던 총명함이 넘치던 여자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마르고 어려 보이던 그녀는 비에 젖은 흙바닥에 내가 발을 헛디디자 아예 내 손을 꽉 잡고 걸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새삼 고마웠다.

   그녀의 이름은 “에에”란다. 스무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는 놀랍게도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아주 정확하고 딱 부러지는 영국식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는 에에는 양곤에서 2005년에 그녀의 시어머니와 아이들과 함께 야간 버스를 타고, 또 3일을 걸어서 태국으로 탈출했단다. 그녀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군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가족들은 야간탈출을 감행했단다.
“그럼 네 남편은 어디 있어?”
당연한 듯 묻는 내 물음에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답 안할래.”라고 조용히 말했다. 순간 미안해졌다. 아마도 이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 또한 에에처럼 힘든 과정을 거쳐, 자유를 찾아서 이곳으로 왔을 터이다. 그들의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 나는 다시 가슴이 아팠다.

    난민캠프 입구에 다시 돌아와서 난민캠프 안으로 들어갈 차에 책들을 모두 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군인들이 우리의 출입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들의 논리인즉, 우리에게 출입허가를 내 준 것은 1회, 2시간에 한한 것인데, 우리가 들어간 지 2시간이 넘었고 다시 입구로 내려왔으므로 재허가를 받지 않으면 난민촌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한참을 태국경찰과 버마선생님들 그리고 한국 사람인 우리들 모두가 한참을 실랑이 끝에 결국 다시 캠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침내  차는 장정들과 함께 큰 길을 따라 올라가고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걸어 올라갔다.

   
‘에에’는 나에게 올라가는 길에 자기 집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따라나선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에에의 두 아이가 숙제를 하고 있었고 막내는 대나무집 기둥에 매단 요람에서 잠들어 있었다. 큰 아이는 영어로 내게 인사도 할 만큼 똘똘했다. 눈망울이 아름답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뭔가를 주고 싶은데, 줄 게 없어서 미안하기만 했다. 전날 가방에 넣어뒀던 초콜렛 하나를 건네주고 집구경을 한다. 집은 여느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대나무로 만든 집에 방이 2칸인데 큰 방은 거실 겸 주방이고 옆의 작은 방은 침실로 이용하는 것 같았다. 전구도 없고, 살림살이도 단촐한 이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웅산 수지의 사진과 그녀의 버마의 독립에 관련된 두툼한 영어책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무엇이 그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까? 



 -에에와 그녀의 아이들-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서니 집옆에는 예쁘게 가꾼 조그만 화단이 있었다. 이 척박한 곳에서도 이들은 꽃을 키우고 감상할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래...희망은 있을 거야...우리가 가지고 갔던 책이 그들의 삶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을 잊지 않는다면, 아픔에 공감하고 작은 것부터 행동한다면 말이다.

    학교에 올라가니 이미 남자분들이 대나무 바구니를 이용해 책을 옮기고 계셨다. 우리는 교무실로 들어가서 일단 가져온 책들을 분류하고 정리했다. 한국사람, 버마 사람 모두 함께 책을 옮기고 분류하는 작업은 덥고 조금은 힘들지만 신나는 일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니 1000권의 책도 금방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book for dream library'의 서막을 알리는 작은 행사를 했다. 박대표님께서 아시아 공동체 학교를 소개하시면서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말씀하시고, 조선생님께서 책이 모여진 과정과 활용방향에 대해 말씀하셨다. 김태은 선생님의 교육이 희망이라는 말씀 그리고 umpiem 학교 교장선생님의 감사 말씀으로 우리들의 소박하지만 뜻깊은 행사는 마쳤다.

                                                                               책과 도서관 건립기금 전달식

단체사진

   수가 방콕에서 만들어 온 ”book for dream“이란 간판도 걸렸다. 2달 후에는 이곳에 버마 어린이들을 위한 작지만 알찬 도서관이 생길 것이다. 이 곳에서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도 함께 자랄 것이다. 우리는 기대 속에 학교를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난민캠프 주민들의 힘으로 일구어낸 운동장을 구경하러 다시 올라갔다. 정말 높디 높은 산을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든 운동장은 감동적이었다. 이들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서 자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며 내려왔다.


운동장에서 난민촌을 배경으로

     다시 굽이굽이 길을 2시간 달려 메솟으로 도착했다. 난민 캠프에 있다가 작은 국경도시 메솟에만 도착해도 느껴지는 풍요로움, 여유로움에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태국음식으로 만찬을 하면서 쿤티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쿤티는 16살에 고향인 인레를 떠나 2년동안 정글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태국으로 넘어온지 12년째라고 했다. 한 눈에 봐도 의젓하고 총명하면서도 위트 있는 쿤티에게는 독립을 위한 고단한 투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버마의 어떤 문제들이 수많은 난민을 양산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쿤티에게 들어보니 버마의 상황은 종족간, 지역간, 또 정부와 지역토호세력간 갈등 등 다양한 갈등이 복합적으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운동의 지향점이 하나로 모아지기도 힘든 듯 했고, 난민 내에서도 세력이 나누어지고 있다고 한다. 젊고, 지식이 있는 청년들은 난민신청으로 선진국으로 향해서 운동의 맥이 끊긴단다. 함께 하는 동지가 떠나버리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긴장된 상황에서도 농담을 던질 줄 아는 그의 여유가 대단하기도 했고, 그런 의지를 가진 버마 젊은이들이라면 언젠가 자유를 되찾을 날이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2008.6.8
    일찍 아침을 먹고 쿤티가 일하고 있는 매타오 클리닉(Mae Tao Clinic)으로 향했다. 매타오 클리닉은 국제 NGO들과 세계각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미얀마난민을 치료하는 무료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단순히 의료진료를 넘어서 난민들의 교육 훈련 및 의식제고 더 나아가 소통과 만남의 공간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조금 한산했지만 평일에는 이른 새벽부터 무료진료를 기다리는 난민들의 행렬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고 했다.

    마침 옆 강당에서는 버마의 평화를 기원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를 쓴 3개국어(영어, 버마어, 태국어)로 된 티셔츠를 입고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평화를 기원하는 집회모습

 실제로 이 안에는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까지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지만 종교의 이름이 아닌 모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초종교적인 집회를 열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노래의 가사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마음과 기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에는 모두 함께 촛불을 들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심한 듯, 체념한 듯한 한 소년의 눈빛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그는 어떤 상처를 갖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곳까지 왔을런지...

쿤티의 안내로 우리는 병원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병원 규모는 생각보다 컸고, 진료소 역시 치과부터 안과, 내과, 산부인과, 에이즈 상담실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입원실은 턱없이 부족해서 많은 환자들이 시멘트 바닥에 그냥 누워있었다.

                    
                                                                                                      병       원 

  게다가 최근 사이클론 때문에 난민유입이 갑자기 많아져서 넓은 강당은 급증한 난민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다. 고통에 아파하는 환자들, 무심한 눈빛의 사람들...희망이란 단어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겠다며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었지만 그게 과연 잘하는 것인지는 의문스러웠다. 이들의 얼굴을 찍어댄다면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나는 여기서 이들을 돕지도 못하고 이들의 아픔을 그냥 아파한 뒤에 죄책감 없이 편한 침대에서 잠들고 좋은 음식을 먹고, 가끔 이들에게 미안해한다면 그게 다 일텐데...    헌신적인 자원활동가들과 난민들에게 마음의 부담감을 가득 느끼며, 모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보고 자각하는 게 나을 거라 위안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태국-버마의 국경(Moei riever point)으로 향했다. 강이라 하기엔 너무 얕고 작은 강을 경계로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이 형성되어 있었다. 강 위로는 공식적인 국경인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고 그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름에 수영할 때나 쓰는 검은 고무튜브에 의지해서 위험스레 국경을 건너고 있었다.

                
                                                다리위 합법                                                            다리밑 불법                                

쿤티의 이야기로는 이들이 바로 생계를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건너는 미얀마 사람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산한 강 위 다리와는 달리 수많은 고무튜브가 강을 건너고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아이와 여성이었다. 강을 따라서 태국측 군인들이 있었으나 밀경을 단속하기는 힘든 것 같았다. 지도를 봐도 알 수 있지만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이 너무 길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질적으로도 태국 국경쪽에서도 중계무역으로 얻는 수익이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곳에 서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오가고 있었고, 난민 중 일부는 강 둔치에서 아예 촌락을 형성해 살고 있기도 하였다. 현실에서는 가끔씩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곳에서 나 역시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 없었다.  


       왼쪽 김태은 중앙 쿤티 오른쪽 필자

3. 정리하기
    그리고 우리는 방콕으로 돌아와서 아시아 최고의 메트로폴리탄의 물결 속에 몸을 맡겼다. 방콕은 올 때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고 엄청난 교통체증과 매연만 뺀다면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열대의 열기를 시킬 때마다, 시원한 수박쥬스를 들이킬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건 우리가 만났던 캠프 난민들의 눈빛이 그들의 간절함이 우리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을 기억할 것이고 그들의 일상에 평화가 찾아오고, 제3국도, 태국으로의 정착도 아닌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기도할 것이며, 우리의 연대가 그들의 삶에 작은 희망이 되도록 함께 나누는 연습을 계속할 것이다. 내년에 다시 작은 도서관을 찾아서 아이들이 책읽는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책으로 더 큰 희망을 선물할 그날을 기대하면서...